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한국프로야구/1983년|1983년]] ==== 1983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선발 [[노상수]]에 이어 구원등판하며 데뷔전을 치루었다. 당시 상대 투수는 [[장명부]]. 첫 타자인 9번타자 [[박준영(1953)|박준영]]에게 2타점짜리 좌전 적시타를 맞았다. 스코어는 단숨에 0-4로 벌어졌다. 다시 [[정구왕]]에게 3루수 쪽 내야안타로 2사 만루. 여기서 장명부와 함께 온 재일교포 유격수 [[이영구]]에게 2타점 중전 적시타를 허용했다. 데뷔 후 3연속 안타를 맞는 순간 스코어는 0-6으로 벌어졌다. 노상수가 쌓아둔 주자가 들어가 최동원의 자책점은 1점이었지만 기대에 못 미친 투구였다. 최동원은 이후 안정을 찾는가 했으나 6회초 정구왕에게 솔로홈런까지 허용했다. 데뷔전에서 2.1이닝 5안타 1피홈런 2탈삼진 2실점으로 물러났다. 최동원의 프로야구 첫 시즌은 '부진했다'는 평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연봉협상 때문에 몸관리를 하지 못해서라고. 1983년 시즌종료 후 하루에 1,0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관리에 들어갔다고 KBS 다큐멘터리에 코멘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부진했다는 성적이 '''208.2이닝'''(5위) '''ERA 2.89'''(11위) 9승 16패 '''148삼진'''(4위)이다. 그것도 38경기(21선발)에 출장해 본인이 거둔 9승 중 8승이 완투승이었고, 선발 7.2이닝 - 이틀 쉬고 구원 2.2이닝 - 다음날 선발 완투승 - 이틀 쉬고 선발 완투패 등의 미친 듯한 혹사를 하면서 나온 기록이다.(5월 28일-6월 7일 11일간 5회 등판, 4회 선발, 3회 완투) 당시의 롯데는 당시 팀타율 0.244(6위)에 승률도 역시 꼴찌를 한 팀이라 괜찮은 활약을 하고도 승운 없이 9승에 그쳤다... 투고타저의 영향으로 평균자책 2.89 찍고도 방어율 순위 11위한 것도 한몫했다. 그 당시의 야구관은 투승타타라고 하는 '투수는 승리 기록이 최고'이던 시절이었기에 혹평을 받았다. 사실, 실업팀 시절의 [[롯데 자이언트]]는 우승 경력이 있는 강팀이었지만,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는 1983년까지 별볼일 없는 약팀일 뿐이었다. 따라서 '롯데 자이언트 시절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 최동원이 겨우 9승에 그쳤기에' "부진했다" 라는 평이 나왔던 것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롯데의 상황에 문제가 좀 있었다. 타선은 박용성-김용희-김용철-유두열이 있었으나 하위타선의 불균형은 원년과 같았고, 최동원 역시 혹사 여파와 몸관리 부족으로 이전의 폼은 보여주지 못한 모양이다. 원년 에이스였던 원년도 탈삼진왕 [[노상수]]와 왼손 투수 [[천창호]]는 전년에 비해 부족했고, 안경쓴 투수 김문희[* 나중에 [[충수염]]수술을 받는데,이 수술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여 은퇴한다.]가 버텼으나 부족했다. 외야수의 고의실책도 있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